군.경찰 4.3주둔소를 찾아서

신례리 : 수악주둔소 (공개용)

거린사슴 2023. 5. 15. 14:11

최근 `수악 주둔소`에 대한 기행단이 많아지고 있고 주둔소 현장이 본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많이 달라 증언에 따른 평면도를 만들어 공개하여 이용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평면도와 관련하여서는 복사, 스크랩, 프린터스크린을 하여 인용하는 것을 금지 합니다.

 

[특징]

가. 위치: 남원읍 신례리 산5 번지

나. 좌표: 33˚ 19' 23"01 // 126˚ 37' 14" 69(고도 373m)

다. 모양: 사각형

라. 돌담: 높이 3m 회곽식

마. 초소: 4개

바. 면적: 약 1,920m² (580여평)

사. 물: 새기내천 서쪽 냇가물

아. 출입구방향: 남쪽

자. 내부집 : 한 채 3칸

차. `ㄴ자 옹성`과 출입구를 지나 一자형 방어 돌담  존재

 카: 쌓은 이들: 위미리,신례리,수망등 남원과 인근 마을민

타. 총안과 총안 사이 위 부분에 위장용 `머리돌` 을 올림

[ 현재]

가. 외형 화곽담 북면이 잘 남아 있음

나. 총구와 회곽도, 내부 집자리가 비교적 온존

다. 민묘가 남북 내외성담을 사용하여 훼손이 있음

라. 201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됨(동서 45mx남북35m)

마. 주둔소 외부에 망루 등 방호 돌담 수개 존재

1967년 항공사진(국토지리정보원 맵(map) 발췌)

 

 이곳은  알려진 곳으로 `수악주둔소`라고 널리 알려진 곳이다. 주둔소가 위치한  자리의 지명을 `수악케`라  부른다.

 위미리,남원리 등은 토벌대에 우호적이고 식량 공급을 안 해주자 1948.11.28일 무장대 500여 명이 남원리과 위미리를 공격하고 마을 주민 50여 명을 사망케한 후 70명을 부상시켰으며, 서귀포쪽에서 온 응원대에 의해 퇴각 했다. 이후 1948.12.31일에도 재차 침입한 후 퇴각하는데 이 때 20여 명이 잡혀 사살됐다.

이후 위미1리 `밍금포`에서 2리 `벌러니`까지 1차 마을 성담이 조성이 됐으며 이후 2차로 `신구물`해안까지 마을 성담을 확장하여 쌓았다.  토벌대가 우세해 짐에 따라 산으로 도망간 무장대들은 한국전쟁 이후까지 수세로 전환 후 수악 위, 성널오름, 입석습지(강각수못)를 연결하는 곳에서 머물며 마을을 호시탐탐 노려 쉐와 말,식기류, 음식 등을 뺏어가기 일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고비로 인적자원을 확장하려한 무장대는 주민 납치로 그 세를 불리는 작전을 폈고 해안마을 습격을 본격화 한다. 그 하나가 1950년 7월 하원동 마을 습격이다. 군 병력이 한국전쟁으로 빠져나가버린 후였기에 경찰은  병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무장대 섬멸작전을 위해  1951년 초봄 이곳 수악케 언덕에 수악주둔소를 설치하고 토벌경찰대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수악주둔소는 전도적으로 쌓은 40여개 넘는 주둔소 중 한 곳이 된다.

 1952년 4월 봄에 있었던 `하찌마키(한라산둘레길)길`을 이용한 대토벌작전의 개인 초소도 이러한 전투 상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이 전진초소들은 한라산 둘레길을 만들며 낮은 곳을 메우는 바닥재로 쓰여 지금은 `몰타린내`(수악계곡) 동쪽에 몇 군데만 남아 있다. 일부는 필자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 흔적에 서너개를 복원시켜놓았다.

 

문: 신례리 마을에서 동원되어 지은 신례 4.3경찰 주둔소에 식량이나 밥은 누가 해줘수강?

답: 정부에서도 보태고 모자라면 마을 부인회에서도 해주곡 해섰지.   마을 성담지키당 우리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 20살되민 군대 가부난 우리가 대신 주둔소에 강 협조원으로 강 보초도 서곡해신디.  지금 예춘 마을회관에 경찰 파견대가 이선 거기서 99식총과 실탄을 받앙 수악주둔소로 간거지.  경핸 거기서 몇 일씩 (협조원으로)보초들 서곡

문: `하찌마키길`도 강 근무 허십디강?

답: 거기도 갔었지. 거긴 길 따랑 옆 사람 보이는데 성 근무 해신디 비 올 땐 직접 지은 개인 초소에 지붕을 낭도 덮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근무허민 수색대들은 그 하찌마키 선 위로 한라산쪽으로 올랑 수색했고...   그때 우리가 간 것도 선배들이 군에들 가부난 우리 16〜18때 강 근무헌거라.   내가 파견대랑 고치 논고오름 쪽으로 실탄도 정 갔던 적도 있다니깐?

문: 예?

답: 그러니깐 논고악과 5임반 사이 5.16도로가 지금 나이신디, 5임반 뒤에 훈련소가 이선 그 우쪽 5.16도로에  주둔소가 이섰던거라. 그까지 실탄이영 쌀이영을 여러 명이 정 갔지게

문: 거기 훈련소는 어떤 형태 여수강?

답: 4각형이어신디 강 보난 3〜4명이 지키고 있었고 낮이난 나머진 토벌허래들 나강 어섰고 해서..., 가져간 걸 부려주고 내려왔고.

문: 거기 위치 핸드폰 지도로 고라줍서

답: 여기 5.16도로 숫자써진 자리라(`후리고지`를 얘기 하고 있었다)

문: 수악케 위에 `적산` 땅도 이수강?

답: 예전엔 읍이나 면사무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적산에 대한 걸 알앙 불하를 받는 사람들이 이서신디  우리사게 그런거 저런거 알아서게? 모르난 그런 것도 불하 못받았지.     불하 받은 사람들사 소문들엉 헌거고...공고도 어서나서.

  일제 후제 돌로 빙허니 돌령 촐밭으로들 써나신디 나중에 세금 내멍 자기 걸로 등기헌거여서..담으로 빙 둘러도 세금 많고허민 귀찬앙   들이쌍 내불민 국유지 되난거고...

문: 주둔소 위 들판이 수악케랜핸게 맞지양? 거기도 경해나수강?

답: 다 맞찬가지지

문: 위미도 주둔소 있다 허는디 다른디 아는 디 이수강..상효쪽이라도

답: 위미는 `감낭굴`쪽에 있었고 솔오름 서편에도 이서났다고 들어나서..

(증언: 2015. 10월 신례리 경로당에서 양00(1938년생)님)

제주신보 1952년 2월 10일

아라파견소 이남 출입 금(禁) / 작전상 비상사(非常司)서 경고

당지 비상경비사령부에서는 헌병대와의 연락하에 금반 작전상 필요에 의하여 제주서 관내 아라파견소를 기준으로 한 동서를 연(連)하는 선 이남의 산야인 제주읍 경내에 한하여 작 9일 이후 군관민 및 차량의 일제 출입 및 야외 작업을 당분간 제한하게 되었다는 바 특수 사정에 의하여 제한지역 내의 입산을 요하게 될 경우에는 군은 헌병대에 관민은 경비사령부에 사전 승인을 얻어야 하며 만약 사전 승인 없이 입산한 자 및 차량을 발견하는 시에는 이적행위로 인정코 엄중 처단할 것이라는데 일반의 협조와 유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967년 항공사진의 주둔소 모습을 보면 이미 묘가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으로는 ㄴ자 옹성이 있었음도 알 수 있고  또한, 집터 자리도 보이고 있다.

필자의 외삼촌(어머니의 오빠: 오경진)이 한국전쟁 이후 경찰에 지원해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 하찌마키는 50여 명 씩 갔댄 했고예? 수악 주둔소엔 어떵행 가난거광?

답: 17살에 하찌마키갔당 20살인가? 그때 쇠들 고끄곡 허난 주둔소도 가까이에 있고 협조원도 해났으니깐 주둔소 구경도 하고 싶기도핸 갔지.

문: 혼자마씸?

답: 혼자 가주 누게랑가?

문: 주둔소 모양은 어떵해수강?

답: 사각형으로..

문: 초소도 각 귀퉁이에 이신거 봐납디강?

답: 귀퉁이에 네 개

문: 거기 강 보난 2층으로 사람이 중간으로 바라다니게(걸어다니게) 되선게 그때도 북쪽만 이서난거광?

답: 모두 섰지, 사각으로 돌아다니고 총구멍도 돌아 가멍 섰고

문: 입구는 어디로 되이십디강? 들어갈 때 기억으론...

답: 입구는 남쪽인데 바로 못들어 가고 앞이 성보다 낮게 일자(-)로 된 돌담이 섰지

그리로 행 들어간 다음에야 성 안으로 간건데 앞으로 못들어가게 거기도 돌담이 이섰어 집 안보이게

문: 강보난 안에 사름들 십디강?

답: 응. 당시 대여섯 명이 있고 순경은 원 호나뿐..밤에만 근무서는거라 낮에 공비들 안오난

(2016.5.8일 위미리  자택에서 나의 부친 한일석(1935생)님)

 

신례리 이순하는  일찍이 부친이 돌아기시고 형이  한국전쟁으로 군인으로 참전해버리자 수악주둔소 축성에 참여 했다. 이때 `위장머리돌`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순하는 지게를 가지고 돌을 옮겼고, 회곽식 성담 안으로 돌아다니게 만들었다고 한다.

밤에는 주둔소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돌을 올렸으며 주둔소 외성의 사방을 돌아가며 머리돌을 올려 놓았다고 한다. 주둔소 구조 역시도 위에서 언급한 구술자와 같이 주둔소 안으로 바로 들어 갈 수도, 주둔소 집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완성시기 즈음에 동원되어 수악주둔소를 쌓을 때 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구슬에 의하면 주둔소가 완성 된 후에도 돌들이 무너지면 또다시 주둔소로 올라가 성담을  보수하러 갔었다고 한다. 

주둔소 경찰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쌀, 된장 등을 주둔소까지 등짐으로 져 날았다고도 했다.

옮기는 이들은 남자였다. 주둔소가 운영되던 1957년까지 머리돌이 있었으며 경찰이 근무했는데 당시 쉐(소)도 목장에 놓아 키울 때라 주둔소 근처에서 주둔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이로 본다면 주둔소의 묘소는 1957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

협조원으로 갔던 마을 사람들로는 양0보, 양0인 등이 기억난다고했다.

이 이전 마을성담 쌓던 시기인 1949년에는 마을 서쪽 신례천 변의 나무들을 시야 확보를 위해 잘라냈다고 한다.

(2023. 1.15일 신례리 자택에서 이순하(1935생.녹음)

이러한 `위장머리돌`은 상효동 남당모르주둔소에서도 만들어 졌다. 상효동 김00은 남당모르주둔소에 근무할 당시 머리돌을 이용해 위장한 주둔소에 협조원으로 근무를 했다.

(상효동  김태읍(1936생).녹음)

서상효 양인택은 마을이장이 마을 소서에게 지시를 하면 근무를 가게 됐는데 수악주둔소에도 가 근무를 섰으며 서상효 마을에서도 주민들에게 나무 장작을 해서 바치라하여 부모님들이 수악주둔소까지 나무를 해 가 배쳤다 한다.

(서상효 양인태)

 

증언에 따른 수악주둔소 모양과 실측

(저작권에 따라 인용.복사 금지, 문의: 공일공 2699-9878)

부득이 인용하는 경우 위 전화번호 또는, 출처(한라산 인문학연구가 한상봉의 블로그 중 `수악주둔소`)를 밝혀주세요. 기존 발간된 저의 책 ``제주4.3시기 군.경주둔소``의 p.179의 모습은 본래 모습이 아니기에 증보판에선 위 새로운 평면도를 사용할 예정

 

 위 평면도를 보면 출입구 방향이 있는 곳은 묘소가 자리하고 있고, 아궁이가 남아 있는 사무실 터 남쪽도 묘 조성으로 집담이 사라졌음을 알 수있다..

주둔소 오른쪽 위의 초소 자리는 위 항공사진에서 보듯이 북동향으로 이어진 켓담으로 사용해버리면서 훼손되었으며 초소 자리와 켓담을 일부러 연결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57년후 주둔소 돌담을 가져다 목장담을 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며 당시 이곳에 방목이나 촐(띠)비기 등이 이뤄지고 있던 곳임이 보인다. 또한, 주둔소 입구 `ㄴ자` 옹성으로 들어간 후 지금은 묘터 자리가 된 곳에 방어 돌담이 약 1.8m 높이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 협조원으로 삼춘밖에 어신거 양?

답: 응. 다 죽어비언

문: 그때 몇 명 이서나수강? 협조원으로 근무헐때

답: 5명씩 근무해서 5명씩

문: 맨날,일주일씩 아니면 몇 달씩마 씸? 근무헐 때 마씸...

답: 혼 달은 안가고..오래되민 보름,  경 안허민 일주일씩

문: 입구는 정 남쪽으로 되 이서나수강?

답: 정남쪽

문: 보통은 서쪽으로 비슷허니 돼 이서났댄 핸게 건 아니구나양?

답: 하여튼 바깥딜로도 영 꼬부라지고..완전 바로 들어가게시리 안되고 영

문: 삼춘 이 그림보민에

답: (입구가) 정면에 앞이도 막아져. 이 (주둔소 출입구)안이도 막아져. 사름이 들어가게 되민은 영 (옆으로)가게 되이서

문: 돌담 이섰구나양?. 아부지가 똑 같은 얘길 허길래 난 거짓말인줄 알아수다만... 게민 이게 맞구나양?

답: (입구로)영 들어 가믄은 사름은 이렇게 양 옆으로 가게

문: 앞에 이거 높이는?

답: 높으지 않허여

문: 우리 키만 해수강?

답: 음~키만해..키보다 조금 나추울꺼라 아마도

문: 밖으로 우리 머리가 보였구나양?

답: 응. 집은 두 개로 되 있는데 동쪽으론(동쪽으로 길게) 남향집이고, 요거(서쪽집)는 우알들에 길게 (입구가) 동향집이고   여기도 또이서 부엌인가 밥해먹는디..우리가 밥도 해먹은디..뒤에 조그만허게 지선  부엌이 동서드래 소름허게 이서부니깐

문: 초소에 올라가 보면 총쏘우는 디는 북쪽만 이서나수강?

답: 아니 아니 서남쪽도 있고 동남쪽도 이서서..초소주, 초소

문: 초소말고 총구멍

답: 총구멍은 몇 개신줄 몰르쿠라..북쪽만 아니고 총구멍은 사방에 다 이서나서

문: 여기 생각나는 분 이수강 경찰관?

답: 양마단지 죽어빗주 유신학이..거기(수악주둔소)101부대가 주둔해 났주게..100사령부라고

문: 삼춘이 간 거는 몇 살때 되는거광? 년도라도...6.25터진 다음에?

답: 6.25터진 다음에..

문: 이 주둔소는 6.25터지기 전에 만든거광 이후에 만든거광?

답: 군인들이 있단에 (6.25터진 후)군인들이 가부난에 우리가 총을 메서. 경찰들하고

문: 그댄 총은 지급이 다 되수광? 개인안티?

답: 야간에 야간에. 주간에는 여기 신례리 경찰파견소에 반납하고 밤에는 총을 가정가서 근무허는거주

문: 그문에 여기 총 놓는 디는 어디여수강? 어느 집 되는 거광?

답: 총? 이 서쪽집 서쪽집.. 동쪽(집)은 토벌대들 살곡

문: 가운디는 뭐 어서수강 방같은 게?

답: 마루는 어서..부섭은 이섰주 불살랑 추는거..굴묵 때보진 안했는디..(내가)겨울 (협조원)생활 안해보면 모르주

문: 집 바닥은?

답: 그대로 나서 ..검질꼬라그네..겨울엔 안살아보난 모르고..

문: 하짜마키길에도 강 근무해납디강?

답: 하찌마키 길은 많이들 가나서, 거의 .나도 가신디 보리오름 앞에

문: 보리오름 앞에 전진초소 이선게 거 삼춘네가 쌓은 거광?

답: 초소가 아니고 5m에 호나고, 낭을 덮엉 낭섶으로 덮었주..검질이 서서? 심심허난 한받디 여러이 이서시난..옆으로 강들  옆이 사름이 같이 이섰주게 혼자 심심허난,(근무 때)  전달허면 옆으로 전달전달 허는거라...좀자부카부댄.   혼번은 멀리 물찻오름(얘기에선 물장오리라 했으나 가는 길이 사려니오름을 지나 궤펭이오름 동쪽 물있는 오름이라 했음)신디 테역밭에서 집합도 해나서, 전 마을 사름 수천 명이 집합 훈련도 해나서

문: 여기서 뭐 가정가수강 ? 먹을 것덜?

답: 먹을 것들 아장갔주.

문: 전진초소엔선 총 준것도 아닐테고양? 죽창?

답: 아니아니 빈손

문: 빈손으로 마씸? 어떵행 무장대 잡으랜?

답: 공비들은 경찰들이 한라산에 올라가그네 허곡. (공비가)내려 와가민 우리가 외민 안온다 해가지고 (하찌마키길의 )선을 지킨거주게 말루만 지키는거주.

문: 어디서 모영 가수강 마을에선?

답: 몰라..우리 저 물찻인가 모영 두 번인가 가나실꺼라

문: 물장오리도 가납디강. 거긴 북군아니꽝?

답: 그 근처 근처는 다 모영가서..근무가 아니고 집결지..여기 (주둔소) 근무헐땐디 글로 집결허는 연습을 해났주게. 두 번이나 가와신거 닮아베여..게믄 각 부락에서 전부 간거라. 쪼금이땅 해산이고..연습이주 집결 연습.  하찌마키도로는 그 냉중이고..하찌마키 헐 때는 상이용사들이

문: 어디로 행 가수강 그때는?

답: 소려니(오름)로 가난거 닮아 풀밭들 이신딜로 행..어딘지 몰라 우리는..밀림으로 가진 안허연

문: 물은 어디 물 먹어수강?

답: 내 서쪽에. 대받이로 정들. 혼 번은 서북청년단 사름인디 방위군으로 온 군인이 신례리 마을에 살멍 숯을 굽잰 사름을 동원행 주둔소 동쪽 내창이서 숯을 구워나서(현 주둔소 가는 길 상잣 넘어 곰숯터를 말함)

문: 잣 옆이 그건가 마씀?

답: 그건 모르겠고 내창 옆이서 숯을 구원 가정가신디 폴아먹잰 그건지 바치잰 그건지는 모르크라. 그런적도 이서서

문: 그럼 잣 옆이 숯터가 그걸 수 도 있겠네양?

답: 그럴지 모르주..나신디 술도 상오랜 해나서 밤이

(증언: 2018.8.5일 신례리  경로당에서 양00(1935생)님.녹음)

 

문: 수악주둔소에도 동원되었섰습니까?

답: 열다섯엔가 하효,공천포,신례리 사람들이 동원이 되었는데 한 50여명이 차출된거 닮아. 그때 하효사는 백0봉이란 사름이 담배불을 잘못 노안 주변이 불이 번젼. (주둔소)일허래 가는 건 고사허고 거기서 불끄단 시간보낸 적도 이서난거 기억남신게. 거기가 대한농장 조금 위 지경이라, 산록도로 보단 아래고, 그 전이는 이생이오름(이승악)앞이가 폭도들 훈련허던디라

문: 이생이오름(이승악) 앞쪽마씸?

답: 거 이생이오름 앞이 조금 편편허곡허디가 이서. 그 뒤 이생이오름은 낭, 벌들헐 때 1965년도 경인가? 낭들그찬 가구도 만들고 해신디... 제재소서. 폴아버린 거였지(참조: 이생이오름 뒤 `오르라진밭`으로 5임반 북쪽의 공터를 착각한 것으로 보임)

(2019.5.6일 하례1리 경로당에서 김00(1938생)님)

 주둔소가 생기자 18세에 협조원으로 참여했던 양00(1935생)님은 이곳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야간에 교대로 2시간씩 보초를 서면서 이층으로 된 회곽주둔소를 빙 돌았다고 했다. 이로 본다면 주둔소는 사면이 모두 회곽식이었는데 주둔소 내에 묘소를 만들며 사라진듯하며 서쪽의 계단도 있었으나 아래쪽에 있는 돌들이라 묘소로 옮겨진듯 하다.

(출처: jtbc보도///http://blog.naver.com/jibs_blog/221230909466)

2018.8.5일 만난 양동주 어르신은 이곳에 대하여 입구에 방어 돌담이 있었음과 옹성이 존재함을 알려주셨는데 나의 부친이 이곳에 갔을 때 봤던 모습과 동일했다.

한편, 이곳에서 협조원으로 근무를 셨던 여자 분도 있었는데 동홍동 주공 2단지에에서 만난 오00(1935생)님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오00 님의 얘기에 따르면 쌓은 시기는 봄이 었으며 신례리 마을 성담에서 보초를 서다 남자들이 모자라니 여자들도 동원이 되었으며 5명이 한 조를 편성하여 네 명이 근무를 서고 한 명이 쉬는 형태를 취했으며 두 달 정도 근무를 했다고 한다.  당시 20살 때로 같은 마을 양0생(1937생)님과 위미리 출신 오0실(1939생)님이 같이 근무했기에 기억이난다 하셨다.

하례리 친정집으로 피난 후 신례리로 올라와 마을성담을 쌓은 후 세 달만에 근무를 했다고 하셨다.  위 증언자인 양0주 님도 알고 있는 사이라 했다. 

(2018.12.9일 동홍동 오00(신례출신 1935생.여) 녹음)

 

성담을 실축하니 외성 폭이 2.4m로 회곽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쪽 내외성 사이/ 넓이 3.4m

서북쪽 성담과 초소 모습으로 초소보다 주둔소 성담이 높게 만들어진 것을 할 수 있다..초소에는 총구 3개가 있고 초소 아래서도 총구가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성의 모습. 높이 1.5-1.6m,  폭1m

남서쪽 초소자리는 그 형태조차 없게 사라졌으며 일부 돌을 바닥재로 써 구르마 등 차량의 통행이에 편하도록 다져 놓았다.

서쪽이 허물어짐이 많은 것은 서쪽 냇가 방향으로 쌓은 목장담을 주둔소 폐쇄 후 다시 가져다 쌓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주둔소 남쪽 상잣 인근 돌담들도 대부분 치워져 큰 돌들만 땅에 박혀 있고 들을 수 있는 돌들은 주둔소로 옮겨졌음을 볼 수 있다.

남쪽 내외담 모습으로 내성의 폭은 1m였으며, 높이는 1.6m였다

남쪽에 있는 계단은 밑변 폭은 1.3m며 위 상부 계단 일부가 사라져 현재는 4계단으로 쌓아져 있다

남동쪽 모퉁이 초소지로 들어가는 모습은 길이 2.7m며 초소는 2층 구조로 지름이 2.5m이다

회곽까지의 높이는 1.8m 였다/ 회곽으로 오르는 계단은 다섯 단으로 쌓여져 있다

동쪽 성담으로서 왼쪽 바깥면의 허물어짐이 조금 더 있고 오른쪽 모습은 사람이 걸어다니던 회곽 통로 모습으로 물리적인 힘에 의해 동쪽(성담 사진 왼쪽면)부분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켓담 경계 영역을 구분키 위해 (주둔소) 이 돌들을 가져간 결과다

오른쪽 위 초소 자리였던 곳은 멀리 이어진 켓담과 연결되며 초소는 사라지고 초소 위치 자리는 켓담을 쌓으면서 그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둥그런 굽담 흔적조차 안보이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은 변형되어 잘못된 모습이다..이 초소담이 모자라자 추가로 가져가기 좋은 동쪽면의 성담을 가져간 것이다

북쪽의 내성은 겹담으로 쌓아 올리다 외담으로 바뀌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출구가 하나 만들어져 있다

외성 북면의 높이는 3.5m 내외며, 이 성담에는 여러 개의 총구자리(=총안)가 만들어져 있다

수악주둔소 현장에 있는 모형도는 최근의 상황을 그린 그림으로서 사라진 성담부분에 대하여 설명을 못하고 있고 초소 모양 및 계단 모양 및 위치도 다르게 되어 있으며 출입구 옆 돌담을 둥그런 옹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민묘를 조성하며 남은 돌담을 출입구로 표시된 쪽으로 밀어낸 쌓은 결과이고 숙소자리 남쪽의 돌담이 현재 없는 것은 묘소 북쪽면 돌담으로 기져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돌담 상태를 본다면 추론컨데 묘소 자리에 출입구 입구가 있었고 옹성이 그 앞에 있었다.

이곳은 4.3연구소 연구원 강태권 님이 찾아낸 곳으로서 1949년 이후 축성되었으며 100사령부 한재길 사령관이 이곳 언덕 위에 설치했다고 하는데 한재길 님은 1952년도 10월 이후에 임명 되었기에 100전투사령부 부대는 일시적으로 이곳을 머물기만 했던 것이 된다.

내가 2008년이후 2015년도까지 만났던 한재길(1920생) 전 사령관은 000오름 뒤에 있는 표고밭에 사시다 얼마전 92세의 나이(2015년경)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100전투사령부 사령관이란 것을 모르고  여러해 동안을 만났기에 상세한 4.3에 대한 얘기를 듣지못했다.

 

<아래의 글은 2004년.6.11일자 신문 기사이다.>>  

제주4·3연구소는 4·3 당시 경찰토벌대 주둔소인‘수악주둔소’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 곳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어 보존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4·3 당시 활용된 대규모 주둔소가 발견돼 보존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제주4·3연구소 유적지조사팀은 최근 4·3 당시 무장대를 토벌하는데 이용됐던 수악(물오름)주둔소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수악주둔소는 남제주군 수악 동남쪽 신례천과 하례천 계곡사이 동산에 위치해 있으며 외성과 내성 등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외성의 높이는 3.5m, 내성은 1.5m 정도로 높이 2m 정도의 ‘회곽’이 존재하며 성터 규모는 동서 방면으로 45m, 남북 방면으로 30m 정도다. 내성과 외성과의 거리는 대략 4m다.(250평 내외) 
또 출입구 정문을 비롯 건물터, 난방을 했던 아궁이터, 화장실터도 남아있어 4·3 유적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상황이다.
주둔소는 1949년 가을에 당시 남군 신례리 하례리 주민들과 서귀포 상효동 주민들까지 동원돼 축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4·3 연구소는 이 곳은 경찰토벌대의 지휘 아래 인근 마을주민을 동원해 집결시킨 뒤, 조를 나눠 무장대 토벌에 나섰던 곳으로 당시 신례리 주민들은 마을에서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축성 당시 주둔소 정문 앞에는 6m정도의 삼나무를 꽂고 하얀 깃발을 매달아 주둔소를 표시했으며 사살된 무장대원을 이 곳 주변에 묻었다는 주민 증언도 나왔다.
4·3 연구소 강태권 연구원은 “내성과 외성 구분이 뚜렷하고 회곽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사실상 처음”이라며 “원형보전이 잘 돼 있어 유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만큼 정비보존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강호진 기자 >>

 

한편, 한라일보 2000. 11.28일자 신례리 고남숙씨(1930년생)의 증언을 보면 1950년초로 1달간 축성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출처: http://www.ihalla.com/read.php3?aid=1208790000266864161>>

 

이 기사에서 인근 마을에서만 올라가 쌓았다고 나오고 있는데 틀린 얘기로 수망리에서 이곳까지와 직접 수악주둔소를 쌓으로 동원된 분의 증언도 있다

신례리 고남숙은 경찰 출신으로 위미리 파출소장을 지냈던 분이다. 본래 한남리 빌레가름 출신이라고 한다.

(한남리 현00(1932생)

 

문: 4.3때도 여기 사십디광?

답: 그땐 민오름 주둔소도 이서 나서 지금은 허물어 져비실꺼라.

문: 예춘 수악 오름 옆에도 주둔소이십디다?

답: 거기도 나가 강 일해 난디라, 당시 한 부락에 몇 명씩 할당 되언 강제동원 해부난 두말없이 나 강 일핸

문: 어떵 행 가게 되수광?

답: 이장이 인솔행 거기 강 인수인계해나서 3~4일씩 작업하고 임시 잠복 초소도 만들고 해신디 의귀리 민오름 뒤 임시 주둔소 허곡 교래리, 적악(=붉은오름)오름 동쪽에 임시주둔소가 이서 났주. 교래리 사름신디 들어민 알거라. 근디 교래리 거긴 묘담 쓰멍 사라져실 꺼라

문: 갈때는 어느 길로 행 가수강? 수악주둔소까진

답: 여기서 목장길로 지난 바로 갔지. 바로

( 2016.10.3일 수망리 경로당에서 김00(1933생))

 김00 구술은 주둔소를 지을 당시 인근 마을뿐 아니라 각 마을별로 남원읍 관내 지역에서 이장이 지휘하에 차출됨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김00 님은 당시 마을별로 차출된 동원자 중에 한 분이 된다. 

현재 안내판에 새겨진 평면도 모습으로 수정이 필요 하다.

2014년 성담 위에 무쇠솥모습

2014년 어느 여름날 모습

서쪽 외성 모습으로 폭 2.4m에 이른다.

서쪽 내성과 외성사이모습및 멀리 북쪽 외성이 보이고 있다.

집터 자리 모습

회곽도로 올라서는 서쪽 계단 모습.

동쪽 외성을 보면 바깥쪽은 돌을 가져가버려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담은 초소에서 이어진 켓담으로 사용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복원 시 켓담을 다시 사라진 곳에 쌓아 놓아야 한다.

모퉁이 초소에 있는 총안

남쪽 내성 돌담/지금은 보수되어 있다.

숙소 중 사무실터, 동서로 길쭉하게 있었다.

2018년까지/ 내부집터 사무실로 이용했던 집터로 온돌시설이 이체롭다. 수망리 민오름 앞 영궨모르주둔소에서도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총안(총구) 모습/ 현재 `위장머리돌`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서쪽 집터 안쪽의 무기고 모습, 지금은 보수되어 형태가 엉뚱하게 된 듯하다. 가운데에 남북으로 이동하는 곳이 있었다.

서쪽 내성

간이부엌

두 건물 사이에 있어 불을 피웠던 드럼통(도라무깡) 테두리 모습이 겨우 남아 있다.현재는 확인치 못했는데 누군가 치워버린 것인가?

남쪽 외성과 산소(담)의 모습, 계단이 있던 자리 돌들이 무너져 있다. 이 계단을 올라 주둔소 성담 돌을 옮겼을 것이다.

산소 곁에 집터 흔적(굽담이 땅에 박혀 있는 부분)이 있어 주둔소에는 증언자의 얘기처럼 세 채의 집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서쪽 위 초소에서 바라본 내성

서쪽 내성과 외성, 일엽초가 이체롭다.

내성과 외성/ 그 사이에 무너진 계단이 보이고 있다.

간이부엌, 이외 화장실터가 남아 있다. 화장실은 가마니를 둘러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