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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등산로 지명

거린사슴 2023. 10. 6. 22:13

한라산(할로산) 국립공원은 1970년 공식적으로 공원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지난 시절 등산객의 증가로 작은 가마니에 흙을 지고 산행객들이 갖고 가 윗세오름대피소에 갔다 놓아야 할 정도로 황폐화 된 일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과 관(官)의 보존에 대한 노력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상산(上山)테우리, 약초꾼들이 사라지며 지명도 함께 사라지게 되버렸는데  틈틈이 할로산(한라산)을 오르내리던 어르신들의 구술을 채록함이 있어 수 백개가 넘는 지명들 중 할로산과 관련한 지명도 확보 할 수 있었다.  아래 등산로와 관련한 지명은 지역어르들이 남긴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한라산의 지명:비매품>을 참조 ]

아래의 사진은 <한라산의 지명>을 집필하던 중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허락을 얻어 현장 촬영된 사진임을 밝힌다. 이곳 사진과 글의 무단 인용은 저작권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단, 글쓴이 출처를 밝혀 이용은 가능합니다.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한라산의 지명> 저자 한상봉]

<< 성판악 탐방로>>

궤펭이오름: 지형도와 일반인들에게 물오름으로 잘못 나타난 곳이다. 성읍리에서 상효동, 교래리까지 광범이한 지역의 어르신들이 부르던 궤펭이오름으로 알려진 오름지명으로 바로잡아야 할 지명이다. 이 궤펭이오름의 동쪽에 이웃한 세 개의 오름은 `산란이(살난이)오름`이 된다.

제1횡단도로는 1932-1935년 사이 일제강점기 시기에 만들어지고 1960년대 확포장됐다. 버스정류장에 확포장을 진두지휘한 김영관 전 제주도지사 공덕비가 있다.

이곳 탐방로 2.1km지점 안내판 인근에는 과거 `해거무니표고장`이 있었으나 철거됐다. 오후 서쪽으로 넘어가던 햇살이 성널(성판악)오름에 가려 어둑어둑한 느낌이 들기에 이 지역을 해거무니 표고밭이라고도 불렀다.

성널오름: `물오름`에서 바라본 성널오름(정면에서 오른쪽)/ 물오름을 동수악으로 잘못 표현하며 부르고 있으나 동수악이란 지명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 물오름은 한남리와 위미리 등에서 보편적으로 부르던  옛 어른들의 오름지명이다. 

속밭: 이 지역은 `족은속밭`과 큰속밭 사이의 길로 남쪽이 족은속밭, 북쪽이 큰속밭으로 신례, 하례, 위미리쪽에 사람들은 `알속밭`, `웃(윗)속밭`으로 부르기도 한다. . 속밭 산행로는 조림을 하며 식생이 변화되었는데 성판악 주차장에서 묘목을 운반하는 사람이 일당을 더 받았다. 인근에 궤에서 머물며 식수를 했었는데 여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이 묘목 심는 일에 참여했었다. 가마니에 묘목을 지고 올라 오면 이곳에서 땅을 파 심는 인부들이 심었다.

너른번데기: 과거(1967년 항공사진을 보면) 3채의 표고버섯 집이 있었던 곳이 었으나 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사라오름 인근에 설치됐던 `사라악대피소`가 철거되며 다시 대피소를 이곳으로 옮겨 이용하고 있다. 지명은 `너른번데기`라 한다. 이 대피소 주변 서북쪽으로는 매우 넒은 평지를 가지고 있어 불린다. 번데기는 평지를 이르는 제주어이다.

사라오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남쪽 능선은 과거 이 지역에 불이 나면서 나무가 사라져 지금은 조릿대가 점령하고 있다.

탱게모르: 사라오름과 진달래밭 사이에 위치한 급경사지로 지금은 나무로 다닐 수 있도록 목책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탱게는 층계, 계단을 이르는 말이다.

진달래밭: 상효동 우마들의 방목지였다. 특히, 동상효 사람들이 우마 방목을 위해 올라다니던 곳으로 대피소 북쪽으로는 20-30m 길이의 `통궤`란 궤가 있어 비바람이 치면 상산테우리, 약초꾼들이 머물렀었다. 통궤에는 술병과 그릇조각이 남아 있다.

대반이멩이: 한라산 정상부 동릉을  오르는 개활지 언덕을 이른다. 아주 넓은 지역으로 나무가 없다. 이멩이는 이마를 이르는 제주어이다. 이곳엔 말(몰)이 비바람을 피하다 들어갔다 죽어다는 `몰궤` 또는, `등터진궤`와 `상여궤`라 불리는 궤가 위치한다.

 

<<돈내코 탐방로>>

보말서덕: 돈내코탐방로를 출발해 바로 올라서는 언덕으로 산불감시소가 위치한다. 보말처럼 작은 언덕이 있는 바위지대를 이르는 지명으로 웃법호촌 사람들이 붙인 지명이다. 이 능선을 오르면 소나무 지역을 지나 낙엽수와 혼재된 평평한 `제한지흘` 지역이 나온다.

제한지흘: 보말서덕 언덕을 오른 후 평평한 지역이 나오고, 한라산둘레길과 만나는 지점이 된다. 과거 나무가 없을 때는 촐(띠)도 비었던 곳이다. 비가오면 물기도 많았던 곳으로 쉐(소)를 이곳에 놓아 키우곤 했던 지역이다. 제한지라는 풀이 많았던 곳이다. 흘은 물기가 많은(덤방한)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출발하고 약 800m지점에 안내판이 있다. 조금 오르다 보면 왼쪽에 궤가 있다.

선수답: 돈내코탐방로 중간에 있으며 냇가가 근처에 있고, `보다밧(표고밭)`이 있는 구역이 된다. 1000고지 부근으로 신효동에 사시던 사람들이 쉐(소)를 할로산(한라산)에 방목 후 몇 주일에 한번씩 보러 갈 때 선수탑을 지나며 ``선수탑인 반반``이라고 했다고 한다. 반반은 한라산 남벽 앞 `움텅밭`까지의 거리가 반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주변 지역이 다른 곳에 비해 평평하다.

 

살체기도: 살체기는 문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은 토평동,동서홍동,신효동,하효동 등 주변 마을 각처에서에서 올라오는 쉐(소)나 몰(말)들이 이곳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정낭과 같은 역활을 하는 `살체기문`을 달아 놓아 쉐(소)나 몰(말)이 다른 마을지역으로 가버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살체기문을 달았던 길목이란 뜻이 지명으로 바뀐 경우다. 등산로 안내판 서쪽으로 옛 우마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사라지고 안 보이고 있다.

둔부바위: 두부바위를 이르는 말로 두부처럼 평평하고 네모져 있어 산으로 오르내리던 테우리들이 쉬곤 했던 바위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둔비바위`로도 불렸다.

평궤/평지궤: 돈내코탐방로 중 산림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수십 명이 들어갈만한 궤가 있었으나 지금은 궤의 내부를 시멘트로 보수하고 돌을 둘러 대피소로 이용하고 있다. 과거 신하효동 상산테우리들의 쉬는 집합소이기도 했다. 토평동 사람들은 `짐당장궤`와 `동산궤`를 이용했다.

조즌내: 평지궤에서 움텅밭 사이를 이동할 때 작은 돌밭이 나오고 작은 냇골도 보인다. 이 지역을 조즌내라 부른다. 조즌은 서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움텅밭: 남벽대피소 남쪽으로 보이는 평평하고 아늑하게 내려 앉은 지형을 이른다. 주변 지세보다 안으로 내려 앉은 형태로 제주에선 이런 지형을 `움텅허다` 라고 한다. 이에서 온 지명이다. 지형 모양을 그대로 지명으로 부른 경우다.

앞갈퀴/앞베리(남벽): 베리는 절벽처럼 되어 있어 식물이 자랄수 없는 벼랑지형을 이르는 제주어다. `베릿내`도 이런 어원이 있다. 갈퀴는 긁어낸듯 날카로은 지형이란 뜻에서 나온 말로 이해 하면 되겠다.  할로산(한라산)을 등정했던 최익현은 남벽을 스님의 장삼과 같다라 표현했다.

검은서덕: `움텅밭`의 서쪽에 두 개의 오름이 있다. 검은서덕은 이중 남쪽에 있는 오름을 이르는데 알방애오름으로 잘못 알려져 있어 바로 잡아야 할 오름지명이다. 감시카메라가 있다. 검은서덕오름의 남쪽 경사지를 `검은서덕 앞가슴`이라 한다. 검은서덕 자체가 오름 지명이므로 검은서덕오름이라 하면 안 된다.

방애오름과 질메톡: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남벽대피소로 이동 하는 곳, 방애오름 뒤(북)쪽 구간에서 남벽대피소로 내리는 언덕을 `질메톡`이라 한다. 질메는 쉐(소)의 등에 얻어 짐 등을 실고 고정시키는 역활을 하는 도구이다. 이곳 지형이 경사지를 오르다 경사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럴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방애오름에는 서귀포 고 씨 집안 묘가 있다. 이 묘는 `도끼동산` 위 서귀포 상설시장에 있다 도시의 확장으로 이곳으로 옮겼다.

가막산: 신.하효동 옛 상산테우리들에게서 확인한 지명으로 <한라산의 지명> 지명 집필 중엔 한 사람에게서만 지명을 확보했었기에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추후 복수의 어른들로 부터 가막산이란 지명으로 불렸음을 확인했다.

우마들이 이곳엔 올라가질 않았다고 한다.

 

 

<<영실탐방로>>

벤드르: 현) 영실주차장 매표소 자리를 이른다. 존자암으로 갈 수 있다. 1950년대 예비역 군인 출신 0 씨가 이곳에 제재소를 차렸었다. 목재 제재소 자리가 지금은 주차장 자리로 바뀌었는데, 당시 모슬포 훈련소로 목재를 운반해 갔고 일부는 시장에 반출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모 기업에서 제2횡단도로에서 이곳까지 길을 포장하여 관광케이블카를 놓으려 했으나 회사의 부도로 중지되며 길만 좋게 만들어져 이후 학생단체와 일반 산행객들이 이용하는데 가장 짧은 길로 활용된다.

영실 앞밧: 영실 윗 주차장이 있고 매점이 있는 일대로 과거에 하원동 우마들이 들어왔으며 구영실을 올라 윗세오름 지역으로 올라갔다.

영실: 고서및 고지도에 무수히 등장하는 곳으로 존자암이 있다 현재의 자리로 이설된 곳이라 전해지고있다. 분화구가 함몰된 오름지역으로 병풍바위와 폭포가 눈길을 끌며, 안개가 낀 날이면 신령이 나타나는듯 몽환적이다. 

박상몰리: 현 영실 탐방로의 한 부분으로 영실 안을 내려다 볼수 있는 곳이다. 병풍바위 옆을 지나간다. 박상은 돌이 많고 험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몰리는 모르와 같은 뜻으로 언덕을 이르는 제주어이다.

구상낭밧:  `상밧(상밭)`이라 한다. 상밧(상밭)은 구상나무가 있는 밭이란 어른들의 표현이다. 구상나무 숲은 밭으로 표현한 경우다.

세오름밧: 윗세 세 개 오름 앞에 있는 들판을 이르는 말이다. 산(선)작지왓으로 잘못 알려져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어르신들의 발음으로는 `시오름밧`이라고도 불린다. 시는 세 개(시 개)를 이르는 제주어이다. 멀리 오른쪽 끝트머리에 `연짓돌`이 보이고 있다. 이 연짓돌 주변을 `우럭밧(밭)`이라 한다. 돌이 많아 우마가 들어가는 것을 꺼린 지역으로 우럭밧(우럭밭)에서 우마의 발이 돌에 끼면 부러져 죽기도 했다. 이처럼 이 일대가 좋지 못해 바다의 험상스러운 우럭을 빗대 우럭밭이라 했다.

참고로, `산(선)작지왓`은  윗세 붉은오름의 남쪽에 위치한 풀이 없고 하얀 돌밭이 있는 공간을 이른다. 산에 오르는 지역민이 달라 그들의 시선에 따라 `흰작지왓`, `신작지왓`으로도 불렸다.

윗세족은오름: 전망대가 있는 오름이다.

윗세누운오름: 윗세족은오름에서 한라산 정상 북쪽으로 보이는 오름으로 정상부에 바위가 있다. 이를 `망바위`라 부른다. 상산테우리들이 올라가 `세오름밧`이나 제주시 방향의 우마들을 관망하던 곳이다.

고장낭밧: 윗세오름 대피소가 있는 주변을 이른다.  `고장`은 키가 낮은 꽃나무들을 이르는 제주어로 이 지역에 키가 작은 철쭉과 진달래 등이 많아 불리는 지명이다. 과거부터 휴게소 북쪽 냇가에 물이 있어 대피소로 활용되었으며 학생들은 원보훈련이란 명목으로 한라산 산행을 할 때 서북벽을 오르기전 하루를 머물며 냇가로 가 물을 떠 밥을 해 먹고 야영했었다.

왕장들: 윗세오름대피소 `고장낭밧(밭)`의 북쪽 냇가 건너에 보이는 낮고 평평한 언덕 들판으로 최근에 새로이 불리기 시작한 지명이다. `왕장서덕`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들판으로 시로미,누운향나무가 많다. 왕장서덕(들)은 포털사이트 지형도에 장구목오름이라 잘못 올라가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서베리(갈궤): 윗세오름대피소 `고장낭밭`에서 남벽으로 이동할 때 한로산(한라산) 정상부를 바라보면 나무가 없고 절벽인 부분이 백록담을 받치고 있다. 이렇게 나무와 풀이 자랄 수 없는 낭떨어지 경사면을 제주어로 베리라 부른다. 한라산 정상부 서쪽에 위치해 어른들은 서베리라 불렀다. 또는, 서갈퀴라고도 한다.

윗세붉은오름: 위세오름 대피소 남쪽에 이웃해 붙어 있는 오름으로 윗세 세 개의 오름 중 가장 크다. 이 오름의 남쪽으로 가면 풀이 없는 하얀돌이 있는 개활지가 나타난다. 이곳을 `산작지왓`라 한다.

광작에홈/샘이쌍홈: 서베리를 바라보며 남벽으로 이어지는, 방애오름 가기 전 윗세 붉은오름 사이 공간으로 두 세 개의 홈(구릉)이진 냇가 있다. 아래로 이어져 `보섭코지`를 이룬다. 보섭은 쟁기의 앞 부분을 이르는 말로 지형이 뽀쪽한 지역이다. 광작에의 어원은 확인이 안 되고 있다. 하효동 어른은 이곳을 진달래밭으로도 불렀는데 대체적으로 구술 중에 어르신들은 진달래나 철쭉이 핀 곳에 대해 진달래밭이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작에홈엔 산악인들이 부르는 백록샘이 있으나 백록샘의 정식 명칭은 `보섭코지물`이다. 오희준케론이 곁에 있다.

 

 

<<어리목탐방로>> 

승(슴)피왓(승패왓): 현) 어리목 광장을 이른다. 탐방안내소 안쪽에 있는 연못이 `승피못`으로 `승피(슴피)`는 숨어있는 물이란 뜻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엔 일본군주둔지로, 4.3때는 오도롱마을 사람들 피난민터로, 한국전쟁 시기는 군 경비소가 있었고 어승생악 정상엔 비밀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사진의 왼쪽 앞 오름은 `족은두레왓`, 오른쪽 `베록콧뎅이` 능선이 보이고 있다. 베록은 벼룩을 이르는 제주어 표현이다.

대난어위: 어승생악에서 바라 본 남쪽 모습으로 가운데 냇가는  `절터목`(丫(아)곡)에서 합류한 물이 광령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사진 가운데 냇가 동쪽 연두색 부분 지역을 `쉐질메톡`이라 한다.

사진 왼쪽 오름은 `족은두레왓`, 가운데 한라산이 보이는 앞이 `베록콧뎅이` 능선, 냇가의 오른쪽 두 골짜기는 `대난어위`에 해당된다. 고지도에 `대난어위`라 보이고 있으며 지금도 광령리 어른은 이 표현을 쓰고 있었다. 동대난어위 냇골이 작고 서대난어위 냇골이 크다. `어위`는 계곡의 주변, 테두리를 이른다. 동대난어위 옆을 따라 어리목탐방로가 `세젭이(사접이)동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젭이동산(사젭이오름): 동대난어위 냇가 옆을 따라 올라오는 탐방로가 이곳에 이르는데, 사젭이샘의 물이 이 오름의 동쪽 탐방로 길가에 위치한다. 샘이 있는 서쪽에 있는 동산으로 오름으로도 취급한다. 이 동산의 정북쪽 아래 평평한 들판을 `민머리`라 했다. 사진은 `돌조진밧(밭)` 상단에서 찍은 모습이다.

돌조즌(진)밧: 사젭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언덕 지역으로 돌이 많아 불린 지명이다. 조즌(진)은 뭔가로 꽉 차고 조밀하게 많이 있다는 표현으로 이곳이 돌이 꽉 찬 지역이란 명칭이 된다. 지금은 조릿대가 덮여 돌이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없는데 모노레일이 지나는 인근을 보면 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만세동산: 이곳의 남동쪽 방향에서 바라보면 돌무더기 형상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는 뜻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만수란 사람이 테우리를 하며 주변 우마를 관망했다는 일설과는 다른 구술이었다. 고지도에 만수동산이라 올라왔을 뿐이다. 두 개의 돌 무더기 서덕이 있다. 서덕은 돌이 뭉쳐있다는 뜻으로 제주어 뭉뎅이와 같은 표현이다.

곰잣벵듸/너븐상밭: 만세동산과 윗세 누운오름 사이 넓은 공간으로 이곳 들판 가운데로 `곰잣`이 지난다하여 불린 지명이다. 지역이 넓어 넓은 윗밭이란 뜻으로 너븐상밧으로도 불린다. 곰잣은 과거 테우리들이 이곳에 우마를 키울 때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를 삼아 이용하기 위해 테우리들이 자발적으로 돌담을 쌓았다. 높이 약 50-1m내외 이며 지금도 조릿대 안에 남아 있다. 곰은 굼이라고도 한다. 굼은 굼을 긋다처럼 경계를 이르는 뜻이 되니 곰잣은 굼잣 즉, 경계담이란 뜻이다

 

<<관음사탐방로>>

춘선도: 관음사탐방로 야영장 자리에 김춘선이란 사람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었다. 이 사람이 살던 곳에 한라산 수림 지역으로 오르는 상잣이 있어 춘선이란 이름 뒤에 길을 뜻하는 도(道)가 붙어 지명으로 됐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 지형도` 제주지형도에 이곳에 집 한 채를 표시해 두고 있는데 김춘선이 살았던 집이된다 하겠다. 야영장 자리가 상잣이 이어지던 자리다. 

들렁머리: 관음사탐방로 주차장 남동쪽으로 보이는 언덕을 이른다. 산체가 머리가 들어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불리는지명으로 관음사 사찰 아미봉 방향이 가장 높다. 

박성(석)층내: 관음사탐방로 서쪽을 따라 흐르는 하천으로 병문천의 상류가 된다. 위로는 구린굴, 알엉,셋엉,웃엉, 거림도가 있다. 박석이 박성으로 발음이 경화된 경우다.

구린곰(구린굴): `박성(석)층내` 하천 안에 있는 동굴로 `구린`은 안(속)이 비어있다는 제주어 표현이 된다. 곰은 굴을 이른다. 속이 빈 굴이라는 뜻이다. 

개목밧도/개둥근도: 보통 탐라계곡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계곡을 오르면 `개목밧(밭)`으로 이어진다. 개목밧(밭)은 개미목으로 오르는 옛 풀밭지대였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들어차 있다. 이 개목밧의 끝을 `개목밧(밭)촐리`라 한다. 위 사진의 다리는 이 개목밧촐리와 이어져 있다. 촐리는 꼬리의 제주어 표현이다.

과거 목책교가 없던 시절 이곳 개목밭촐리로 오를 때 사람을 따라오르던 개가 미끄러져 뒹굴었다 하여 `개둥근도`로도 부린다. `둥근`은 딩굴다란 뜻이다.

개목밧촐리./멘주기촐리: 과거 적십자대피소가 있던 인근으로 얼마 전 이장한 묘에는 蟻項末落(의항말락)이라 적혀 있었다. 또는, 이곳을 `멘주기촐리`라고도 했는데 `멘주기`는 올렝이를 이르니 올쳉이꼬리 부분이란 뜻이다. 지금 이 대피소는 허물어져 그 자리에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을 오르면 원점비 안내판이 나오고 소나무가 자라 있는데 과거 개목밭(개미등)으로 불리던 조릿대 지역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개목밭에서는 과거 우마방목도 이뤄졌던 곳이고, 묘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장됐다.

개미목: 현) 삼각봉대피소의 인근으로 양 옆의 깊은 계곡으로 인해 폭이 좁은 탐방로 길이 이어진다. 개미의 목처럼 좁은 지역이란 표현이다.

조베기바위/연두봉(鳶頭峯): 삼각봉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붙인 바위 지명이다. 이은상은 매의 머리와 닮았다 하여 `연두봉`이라 했고 도남동,오등동,아라동 옛 어른들은 `조베기바위` 또는, `보리고루조베기`라 불렀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이 바위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올 징조이니 일하던 밭일을 서둘러 마쳤다고 한다.

앞막은다리골짜기: 용진동으로 불리지만 최근에 누군가에 의해 용진각대피소를 만들며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지(龍池:용이 산다는 못)는 고지도에 `물가메(소백록)` 자리에 표시되어 있다. 근래에는 동탐라계곡이라 하지만 옛 어른들의 얘기에서 전해지는 근거는 없었다. 할로산(한라산) 북쪽 백록담 앞를 막았다 하여 앞을 막은 골짜기란 의미로 불린다.

연듸돌(연대돌): 고지도에 연대 또는, 고연대라 표기된 곳으로 이곳에 제주의 위급상황을 연기를 피워 육지로 알리던 연대를 만들어 두었었다. 연대가 이 바위 위에 있었는데 감시카메라 있는 곳에 연대의  굽담(밑돌)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왕관암이라 지은 것을 후대 산악인이 그대로 인용하며 왕관릉으로 불리고 있다. 나이드신 지역 어르신들은 지금도 `연듸(대)돌`이라 불렀다. 일본인이 남긴 명칭을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우장바위: 바위가 우장을 펼쳐 놓은 듯 바위가 늘어서 있어 불린 지명이다. 쉐(소)를 방목하던 1960년대까지도 우장바위 옆으로 쉐(소)가 경사지를 올라 이동하기도 했는데, 어떤 테우리는 우장바위 옆에서 바위 위의 들판 `신카름밧`으로 오르는걸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을 가지고 올라가 우마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도 했다. 산악인들의 동계훈련지로 유명한다.

신가름밧(밭): `우장바위` 위에 평평한 들판 지역을 이르며 장구목으로 잘못 불리고 있어 수정이 필요한 지명이다. 해안동 마을지에도 `신가름밭`으로 나온다.  신이 밭을 간 것처럼 일정하게 이랑과 고랑 물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신(神)이 아니고선 산속에 밭을 간 것처럼 만들어질 수 없다 하여 붙인 지명다. 지금은 조릿대로 덮여 그 흔적을 찿기 어렵게됐다. 신가름밧(밭) 가운데로 `곰잣`이 남아 있다. `장구목` 위치는 사진에 보이는 둥그런 `큰두레왓`과 `신가름밧(밭)` 사이 좁은 목이 있는 길로, 양옆에 깊은 계곡을 끼고 있어 우마 출입이 어려웠던 곳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나무나 가시덤불을 놓아 `큰드레왓`의 우마가 `신가름밭`으로 넘어가질 못하게 했던 곳이다. 동물의 목처럼 좁아지는 곳을 목이라 했다. 장구의 가운데 부분처럼 좁은 목자리에서 온 표현이다.

들선바위(입선암): 들리고 서있다 하여 불리는 바위로 고지도에 `입선암`으로 보인다. 인근에 관망터가 있다.

들선궤: 한라산 정상부 북쪽에서 동릉 정상으로 이어진 탐방로 길가에 위치한 궤다. 들선바위(입선암)와 가까이에 있으며 한라산 정상부 `몰궤`(등터진궤), `목사궤`(이용한 사람은 있으나 위치확인을 못함), `상여궤`와 더불어 백록담 가까이에 접해 있는 궤다.

궤는 바위그늘집을 이르는 제주적 표현이다. 이와 비슷한 `엉`이란 바위그늘이 있다. 엉은 물가와 가까이에 있어 불리는 바위그늘집으로 `큰엉`, `엉도`는 바닷물이나 냇가의 물과 관련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엉을 기정(낭떨어지)과 같다고 표현하는 해설가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남원 해안가 `큰엉`에 가서 보면 바위 안으로 들어가 있는 엉 2개를 볼 수 있다. 엉도는 엉 앞에 있는 냇가를 건너던 길(道)이 있어 불리는 명칭으로 지금은 과거 배고픈다리에 현대식 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백록담: 전설이 지명으로 표현된 곳이다. 흰사슴이 이곳의 물을 마셨다 하여 전설로 전해진다. 과거에 우마들이 들어와 물을 마시고 땅을 밟아줘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일이 없었다. 옛 상산테우리들은 국립공원지명 이후 우마가 사라지자 백록담의 흙이 물로 인해 들뜨며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갈수기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구봉암: 정상부 북쪽에 위치한 바위로 봉우리와 같은 바위가 9개가 있어 불린다. 고지도에 구봉암으로 나타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무 암매(岩梅) 모습